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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창 아래의 생물들(겔 1:22-25)-2019.3.31

2019331일 주일오후예배

제목 : 궁창 아래의 생물들

본문 : 에스겔 122-25

말씀 : 한양훈 목사

 

 

에스겔서를 보고 있는데 에스겔서를 보면 에스겔 선지자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에스겔을 발람이나 요나 선지자와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글을 읽어보면 그 글을 쓴 사람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생각과 사상, 얼마나 실력이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에스겔의 글을 보면 그가 하나님의 종이고 최상위급의 선지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지자들 중에서도 에스겔은 존경받을 만한 분이십니다. 그 정도로 영적으로 깊고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이룰 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2절에 보면 그 생물의 머리 위에는 수정 같은 궁창의 형상이 있어에스겔은 지금까지 네 생물의 활동을 보았는데 그의 시선이 이제 그 생물의 위를 보게 됩니다. 네 생물의 머리 위에는 수정 같은 궁창의 형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을 보게 됩니다(28). 지금 선지자 에스겔이 수정같이 맑은 궁창을 보고 있습니다. 궁창은 형상을 이루지 않는데 형상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궁창은 단순히 빈 공간이 아닙니다. 그 공간에 무엇인가 차있는 영적인 공간인 것입니다. 맑은 궁창은 네 생물 보다 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 위를 보니 깊고 넓은 하늘이 보이는 것입니다. 하늘위의 하늘이 보이는 것입니다. 여기가 대기인지 대기가 아닌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바로 보좌를 보기 때문입니다.

보기에 두려운데이는 워낙 신비하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을 보지 않고 궁창만 보았는데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 궁창이 비어있지 않고 무엇인가가 차있으므로 그로 인해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단순한 맑은 하늘을 보았다면 두려워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영적 세계이므로 빈 공간이지만 거기에 권위가 있고 신적 능력이 차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하늘과 전혀 다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이 두려워한 것입니다.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이 계시는 공간을 체험함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저절로 자신의 보잘 것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교만할 수 없습니다. 영적 체험이 깊을수록 하나님이 계심을 알고 두렵고 떨림으로 겸손해집니다. 결국 하나님이 계시는 공간을 체험한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인 것을 본문이 알려줍니다.

그들의 머리 위에 펼쳐져있고네 생물 위에 큰 공간이 있는데 그 두려운 공간이 넓은 하늘이 펼쳐져 있듯이 펼쳐져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46절에서도 보좌 앞의 수정 같은 유리바다에 대한 표현이 나옵니다. 하늘은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수정 같이 맑고, 바다 같이 너무 맑아서 두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은 수정 같이 맑은 것입니다. 네 생물 위에서 수정 같은 맑은 공간이 펼쳐져있고 하나님의 보좌 앞의 바닥도 수정 같은 유리바다가 펼쳐져있습니다. 에스겔은 환상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 보좌 앞에 있는 네 생물을 보았지만 하늘나라에서 예배하는 공간을 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마다 보여주시는 범위가 다릅니다.

사람은 맑아야 하나님을 바로 만나 뵐 수 있습니다. 만일에 맑지 않으면 수정 같은 바다가 있는 그곳을 건너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수정은 맑고 불순물이 없어서 물체가 있는데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유리도 품질이 좋은 것은 보기에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여서 가끔 유리에 부딪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여 깨끗하여지면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있는 공간이 광활하지만 순식간에 통과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공간에 불순물이나 장애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영적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에 대한 어떤 책을 보았는데 거리가 아무리 멀어도 그 공간 안에 방해하는 것이 없다면 순식간에 소리가 전달될 수 있다고 합니다. 궁창과 그 너머의 하나님을 한 순간에 에스겔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공간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궁창이 똑같이 존재합니다. 하늘세계는 변함이 없습니다.

 

23절에 그 궁창 밑에 생물들의 날개가 서로 향하여 펴 있는데이것은 앞에서도 말한 것입니다. 네 생물을 중심으로 그 위에 궁창이 있고 반대로 궁창 아래에는 네 생물이 있는 것입니다. 이 생물들이 날개를 펴고 있는데 이 날개가 서로 연하여 있다는 것은 앞에서 나왔던 내용입니다. “이 생물은 두 날개로 몸을 가렸고 저 생물도 두 날개로 몸을 가렸더라즉 날개가 여러 개라서 두 날개로는 옆의 생물의 날개와 붙어있고 다른 두 날개로는 몸을 가린 것입니다. 날아다닐 때는 그 날개로 날지만 날아다니지 않을 때는 날개로 몸을 가리는 것입니다. 날개로 몸을 가린 것은 하나님께서 오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몸을 가린 것입니다. 날개로 몸을 가린 것은 겸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종 드는 자세입니다.

 

24절에 보면 생물들이 갈 때에 내가 그 날개소리를 들으니에스겔은 이 네 생물에 대한 환상을 오랫동안 보았기 때문에 네 생물의 변화무쌍한 모습을 다 관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에스겔은 영안이 열려서 동영상을 보듯 오랜 시간 환상을 보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생물들이 가는 모습도 보았는데 네 생물이 움직일 때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습니다. 네 생물이 날개를 움직여 소리가 나는데 특이한 소리가 들립니다. 영적 세계는 물질세계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영적 세계라도 똑같이 날갯짓을 하고 그 날갯짓의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이므로 날갯짓을 하지 않고 소리도 없이 그냥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으나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많은 물소리와도 같으며날개 소리는 마치 맑은 물소리와도 같고 폭포수가 쏟아지는 소리 같으며 우렁차고 시원하며 거치는 것이 없습니다. 파도치는 소리나 큰 폭포의 소리, 홍수가 났을 때 흐르는 물소리를 생각하면 됩니다. 아마도 표현하기 어려우므로 이렇게 비유로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물소리는 사람들을 즐겁게 합니다. 기계소리 같은 경우는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지만 자연의 소리는 사람에게 좋은 느낌을 줍니다. 강력한 소리라도 그렇습니다.

전능자의 음성과도 같으며이는 날개소리가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린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위엄 있는 전능자의 소리를 들어보았습니다. 이 글은 모든 환상을 다 본 후에 정리해서 썼을 것이기 때문에 전능자의 소리를 알고 이렇게 표현하였을 것입니다.

떠드는 소리 곧 군대의 소리와도 같으니에스겔이 들었을 때 군대의 음성과도 같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에스겔은 이 소리를 정확하게 표현하기 어려움으로 여러 가지로 비유를 들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군대는 명을 받아 싸우는 사람들인데 네 생물의 소리를 군대의 소리에 비유한 것에는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어떤 학자는 본문을 원수와 악을 징벌하시는 하나님의 군대의 소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군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수를 치시고 불의한 자를 징벌하실 때 네 생물을 보내서 치시는데 그 때에는 화평의 복음을 들고 가는 것이 아니라 군대로서 싸우듯이 가서 징벌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네 생물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강력하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 106절에서는 무리의 소리”, “우뢰의 소리라고도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거룩한 소리입니다. 하나님의 본체가 말씀하실 때 네 생물의 날개가 살살 움직이면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도 보좌에서 날개가 움직인다고 하겠습니다. 주님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일하시는 분이시지만 천하지 않고 쓸데없이 위협하지도 않고 견실된 위엄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 생물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내렸더라이 생물은 활동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쉴 때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쉴 때에는 날개를 내린다는 것입니다. 임무가 끝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키신 것만을 하고 다 끝나면 날개를 내리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하나님이 시키실 때에만 날개를 피고 서로 협력하여 일하고 하나님이 시키지 않으실 때는 날개를 내리고 쉬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시키지도 않으셨는데 자신이 나서서 일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고 명하지 않는데 혼자 나서서 일하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명하지 않으실 때에는 겸손하게 그 아래에 앉아 날개를 내리고 순종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의 영적 원리입니다.

 

25절은 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서부터 음성이 나더라네 생물의 머리 위에 궁창이 있는데 이 궁창은 위엄이 있는 공간입니다. 그런데 그 공간 위에서부터 음성이 나는 것입니다. 결국 네 생물 위에 궁창이 있고 또 궁창 위에 또 다른 공간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음성은 24절의 날개에서 나는 소리와는 구별된 하늘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에서 보면 전혀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어로는 네 생물의 날개 소리는 ‘sound’라고 표기하고 있고 궁창 위에서 들린 음성은 ‘voice'입니다. 그래서 네 생물에게서 나는 것은 단순한 소리이고 궁창 위에서 들린 것은 음성은 보좌 위의 하나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궁창 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하나님의 음성소리를 에스겔이 들었던 것입니다. 음성과 소리는 다릅니다. 음성은 단어가 있고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소리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네 생물의 소리는 위엄이 느껴졌지만 의미는 없는 소리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음성의 내용은 2장에서 나옵니다. 21절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시며라고 하셨습니다. 에스겔은 그 말씀을 알아들었습니다. 에스겔이 이 때 히브리어나 아람어를 사용했을 것인데 어떤 언어로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에스겔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하셨으므로 그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에스겔은 이 음성에 대해 묘사하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날개에서 나는 소리들도 결국 하나님의 음성과 같은 성질의 소리라는 것입니다.

그 생물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내렸더라에스겔은 계속적으로 네 생물을 주의 깊게 보고 있는데 역시 반복적으로 설 때마다 날개를 내리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네 생물은 전능자이신 하나님 앞에 겸손히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궁창 위에서 말씀하실 때 네 생물이 날개를 접은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려고 입을 여니 권세와 능력이 있고 바퀴와 눈이 있는 대단한 네 생물도 겸손하게 날개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아버지가 할 말이 있다고 할 때 가족들이 무시하고 안 들으면 그 집안이 잘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집이 바로 설려면 가장이 말을 할 때 모든 가족들이 하던 일을 다 멈추고 와서 겸손히 들어야합니다. 어른이 말씀하시면 다들 가만히 들어야 합니다. 만약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말할 때 어머니가 반발하고 나서면 집안 규율이 서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보좌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때 네 생물은 날개를 접고 다소곳이 앉아 있고 오직 하나님과 에스겔이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네 생물은 하나님이 에스겔과 대화하실 때 끼어들지 않았습니다. 에스겔은 결국 네 생물의 모습도 보고 궁창도 보고 그 위 보좌에 계신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에스겔은 스스로 선지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을 본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에스겔이 네 생물 위의 궁창에 간 것은 아닙니다. 이 땅에 있지만 그 어마어마한 궁창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음성이 계속 들려오는 것입니다.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라는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이런 영적세계를 보고 체험한다면 신앙생활에 즐거움을 느낄 것입니다. 네 생물의 모습과 위엄을 보고 그 소리도 듣고 또 더 높은 곳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는다면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이것은 에스겔이 체험했고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사람은 동일하게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체험을 하면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내용을 실제로 체험하면 영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 수 있으므로 문자에 매여 있지 않게 됩니다. 성경은 정경이지만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다 묘사할 수는 없습니다. 영적인 책들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체험한 간증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볼 때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기회는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제한이 없습니다. 우리가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면 당연히 누리고 살 수 있지만 그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 전에 체험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쓰시는 것이 감사하고 거기에 더해 직접 나타나셔서 불러주시면 더 기쁠 것입니다. 우리교회의 성도들은 에스겔처럼 영적으로 수준이 있어서 성경에 나타나는 이런 일들이 남에게 나타나는 먼 일이 아닌 나에게 나타나는 일이 되길 바랍니다. 물론 이런 체험을 모두가 다 해야 하는 것이 아니며, 설혹 이런 체험을 하였다고 그가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칭함을 받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